WCC (2) - 역사적 배경 ;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방법, 사람의 자원으로 ...결과적으로 현재 WCC는 변질되었다
초기 WCC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이 된 기독교 교파들이 서로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 협동을 통해 기독교 일치와 갱신을 이루고자 하는 교회 일치 운동(Eccumenical Movement)의 상징이자 구심점을 이루는 조직입니다.
선교를 더 잘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개신교내에서 가장 큰 국제 기구입니다.
초기 WCC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조직기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WCC를 장악하며서, WCC는 변질되었습니다.
* 참고: 자유주의 신학은 다음과 같은 5대 근본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기관을 세우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러 오셨다.
출처: https://lesserpainbetterlife.tistory.com/1462 [전진수블로그 ✝ = ♥:티스토리]
먼저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1937년 7월에, 두 위원회 대표 35명이 만나서 WCC를 공식적으로 정하고, 각각 7명 씩 전체 14명 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1938년 5월에, 우트레이트에서 위원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1939년에, 성 게르메인에서 14인위원회 모임을 두 번째로 가졌습니다.
이때 결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해서 개최되지 못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개최가 되었습니다.
* 2차 세계 대전 :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일어남
IMC(국제선교협의회)는 이때 동참하지 않았으며,
WCC 제3차 총회때에 동참을 합니다
케넷 에스 라토렛 (선교 역사가)
"WCC는 몇 몇 동방정교회와 카톨릭 교회의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라고 선교 역사가인 라토렛은 말했다.
"이것은 비 프로테스탄드 교회들과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성취되었다"
"사실 에큐메니컬 운동에 수반되는 것은
고백적 양심의 갱신이다" 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은 "분열과 반목으로 치닫덛 개신교회 안에" 연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이 있었던 점,
또 초기 WCC가 비교적 건전하게 시작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WCC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3개의 위원회가 탄생합니다 . 이들은 선교를 더 잘하기 위한 연합조직입니다.
협력과 연합을 통해 세계 선교를 촉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이들 위원회의 역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매우 사역 중심입니다.
1910년 에딘버러 회의가 오늘날 에큐메니칼운동의 기점이긴 했으나,
이로부터 38년이 지나서야 WCC는 창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에딘버러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약사(略史)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921년에는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를 창설
이 모임은 에딘버러 회의가 남긴 가장 두드러진 결과였다.
2) 1925년에는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이 창설.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인간생활 전반에 적용시키려는 관심에서부터 시작했다.
3) 1927년에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가 창설.
여기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심이 아닙니다.
WCC는 사역 중심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받았겠지만, WCC가 변질되고 실패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중심의 사역을 원하셨기에
네비게이토(1933년, 도우슨 트로트맨, Dowson Trotman)을 통해서 사람을 세우는 제자훈련을 시작하셨습니다.
에딘버러 대회 이후 국제선교 협의회(IMC),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생활과 활동(Life and Works) 등 세 단체가 각기 나름대로의 모임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1937년에는 에딘버러(Edinburg)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묶어져야 한다는 제안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행은 WCC가 창립되던 해인 1948년까지 지연되었습니다. 무려 38년이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면 1910년 이후 WCC가 창설되기까지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역사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지연되었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 회의는 진보적인 신학의 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대회는 교리적인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지도자들이 과거의 일들을 비평하면서,
더욱 포괄적인 신학,
더 넓고 포용성 있는 대회를 주장하여
진보적인 신학과 종교혼합주의(宗敎混合主義)로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방법과 하나님의 자원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WCC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방법과 사람의 자원으로 하였습니다.
매우 타락한 신앙체계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려 38년 동안 지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노봉린 박사의 지적을 통해서 통찰을 얻기 바랍니다
"신정통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 WCC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장악했지만,
자유주의 신학이 도입되면서 WCC신학은 변천을 맞은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WCC는 공식적으로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조직되었다.
그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 내에는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교들과
미국의 자유주의 선교학자들로부터
신학적으로 자유주의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WCC 운동 안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세계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세계 선교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조 모트는 최고의 세계 선교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세계 선교를 위한 에큐메니컬 연합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0년부터 1952년까지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은 WCC운동을 이끌로 세계 선교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이후 불행하게도 WCC 내의 자유주의 지도자들이 IMC와 에큐메니컬 운동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WCC 안에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를 소개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WCC신학을 바꾸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
제 생각에 노봉린 박사의 이 지적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