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을 넘어서 하나님나라의 가치이다.
특히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을 이용만 한다. 아무런 입장이 없다. '북한은 금기'라는 80년대 사고방식에 갇혔다.
유시민, 심상정, 노회찬 등 현실 정치에 속한 진보 정치인들에게 아쉬움이 너무 많다.
유시민(전 보건복지부장관) | 심상정(정의당 국회의원) | 노회찬 (2018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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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전 : 김영환이 간첩으로 포섭된 이전 |
김영환이 1989년 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되기 이전의 주사파만 진짜 주사파입니다
그 이전의 주사파는 자신들이 북한하고 직접 연계가 없고
스스로 평양방송 듣거나 공부해서 친북이 되었다
1985~86년에 탄생한 주사파가 89년가지, 3년 사이에는 소위 말하는 스스로 북한과 연계가 없고,
스스로를 '자생적인 NL'이라고 주장하던 시대인데요 여러분께서 이 시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NL : 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자주파, 종북주의) - 반미
*PD : People's Democray 민중민주 (평등파, 계급투쟁) - 반자본가
🦑 전대협세대는 86년~89년 사이의 '공적'으로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는 조직입니다
1987년에 6.29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NL들은 자신들을 6.29선언과 직선제를 쟁취하였기 때문에 우리 현대사에서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전대협은 그 결과로 탄생한 범 학생조직인데,
이 전대협은 이런 NL의 영향권에서 탄생했지만,
87년 6.29선언과 직선제 쟁취라는 공적을 힘입고 탄생했습니다
PD와 NL 모두 전대협 출범을 긍정했습니다.
🦑 전대협세대는 이들은 한국 현대사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취해도 괜챦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세대입니다.
심지어 한국 우파들도 약간은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전대협 세대들이 간첩활동을 하여도, 혹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이적활동을 하여도
군사정권에 맞서기 위한 것이며, 독재정권을 맞는 것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친북을 수단삼아서 활동하고 있는 조직들입니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자생적이며 내부적으로 판단하여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혹은 학생운동사에서 86년~89년 딱 3년만에 있었던 과거의 공적을 기초하여 아직도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조직들입니다.
(사진출처: 서울경제)
- 참여정부 이후 대거 정치권 입성
- 초대 의장 이인영, 與 원내대표에
- 3기 의장 임종석은 現정부 2인자
- 靑이어 지방정부까지도 대거 장악
- 한국정치 '새 중심세력'으로 성장
- "실력·유연함 없으면 실패" 지적도
1989년 이후: 김영환이 간첩으로 포섭된 이후 |
김영환이 간첩으로 포섭된 이후에
그의 활동을 이해하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재명 사태를 이해할 수 있고, 부정선거 문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강철 김영환
- 이름 : 김영환 (서울대 법대 82학번) - 전향한 '주사파 대부' - 1998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직후 전향해 현재는 북한민주화에 투신 중이다 - 2012년 중국에서 활동 도중에 114일간 수감생활이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 방문은 불가능하다 - 그는 북한에 포섭되지 않은 채 스스로 '구국의 소리' 방송과 주체사상 관련 서적을 탐독한 자생적 종북주의자였다. 식민지인 한국은 반미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며 NL혁명이론(주체사상)을 주장했다 -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수도권 대학에 전파하기 위해 국내 첫 주체사상 교본이자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던 '강철서신'을 썼다. - 1998년에 민혁당 사건 직후 전향하였으며, 2015년에 회고록 '다시 강철로 살아'를 출간했다 |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한반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학생들에게
'강철서신'에 담긴 주체사상(종북반미)-은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인 북한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민족/통일을 외치는 '토착 전술론'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종북반미 : 북한은 우군, 미국은 적군
<주사파 친북 학생운동의 리더로서의 김영환 : ~ 89년까지> :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간
🦑 1986년 :
김영환(현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주체사상 교범인 '강철서신' 집필해 대학가에 배포
🦑 1986년 11월:
김영환, '민족해방 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
🦑 1987년 8월 :
하영옥(서울대 82학번, 현재 학원강사),
박ㅇㅇ(서울대 83학번, 현재 변호사)
이석기(한국외대 82학번) 등 5명
김일성주의 청년혁명 조직인 '반제청년동맹' 결성 결정
🦑 1988년 4월 :
ㅇ하영옥, 이석기 등 5명. 반제청년동맹 결성준비위원회 구성하고 중앙위원 됨
🦑 1989년 2월 :
ㅇ김영환. 반제청년동맹 가입
🦑 1989년 4월:
ㅇ 하영옥, 이석기 등 5명, 반제청년동맹 결성, 전국 대학가에 김일성 생일 축한 유인물 배포
이때부터 학생운동의 순수성이 사라졌다 직장인 넥타이 부대, 민간인이 함께하면서 군사적인 배경도 없었다. 하지만, 북한에 포섭된 이후부터는 이들의 모든 활동은 간첩 활동에 불과하다. |
🦑 1989년 7월: 새로운 판이 열림
ㅇ 북한사회문화부 남파 간첩 윤택림. 김영환 포섭 후 공작금과 난수표 등 전달
"김영환 선생과 통일 사업을 논하고 싶소" 라고 접근한 사람이다.
<한국의 자생주사파, 즉 NL이 아님. 북한의 지령은 받는 북로파, 즉 북한노동당파(김일성 세력) 입니다>
1991년 : 관악산 1호 (암호명)
김영환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평양으로 가서 1991년 정식으로 입당식까지 치렀고,
북한으로 부터 '관악산 1호'라는 대호(암호명)를 받았다 윤택림으로부터는 평양방송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암호책자, 난수표, 해독표도 받았다.
김영환의 제의로 반제청년동맹을 지하당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개편 결정. 북한에 관련 내용 보고.
1991년 5월에 17일간 조유식(서울대 83학번. 연락책, 현재 알라딘 대표)와 함께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들어갔으며, 북한에 머물면서,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까지 하기에 이른다.
🦑 북한의 지령을 받는 김영환
89년 이후 김영환은 더 이상 자생적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북한의 경제적 후원(당시 40 만 불, 아파트 몇 채에 해당)과 지원을 받고,
북한의 지령을 받으면서 간첩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지하당 당수로서의 김영환 : 89년 이후 ~98년 까지 > :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기간
🦑 1991년 ~ : 김영환은 지하당 민혁당의 당수가 됨
🦑 1991년 5월 : 김영환, 조유식(서울대 83학번, 연락책, 현 알라딘 대표)과 함께 입북해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
🦑 1991년 ~ : 민주주의민족통일연합(전국연합) 결성.
🦑 1992년 3월~ : 김영환(중앙위원장, 총책), 하영옥(중앙위원, 조직책), 박ㅇㅇ(중앙위원, 선전책) 등 3명,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민혁당 창당. 도당 성격으로 경기남부위원회(위원장 이석기),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구성. 산하 지역별 위원회로 울산지역위원회(박경순, 통합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성남지역위원회(이석기), 부산지역위원회(이의엽, 통합진보당 정책위원장) 등 구성. 부분별 사업지도부로 통일운동사업부(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수도남부지역사업부(이상규, 국회의원 당선) 등 구성
🦑 1992년 8월 ~ 10월 : 안기부. '1995년 적화통일' 목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참여와개혁실천 부천시민사회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등 120명 체포
🦑 1993년 1월 : 안재구. 조선노동당 남한 내 지하당 '구국전위' 결성
🦑 1994년 6월 : 안기부, 안재구 등 구국전위 관련자 23명 검거
🦑 1994년 : 2기 한총련 출범 (조선대학교, 의장 김현준) - 전대협과 달리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연합)은 이적단체로 분류가 됩니다.
1994년 3월 ~4월 : 주한 미국인들은 본국으로 귀국.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미국대통령과의 통화를 통해 전쟁 강력히 반대.
서울 소재 외국인 학교는 방학 하기 한 달 전부터 문을 닫음
1994년 6월 : 미국. 북의 핵시설을 폭격하는 D-day까지 잡음
1994년 7월 : 김일성 사망
1994년 제2기 한총련 출범, 김영삼 정부(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쌀개방 반대 시작, UR 재협상 촉구
🦑 1995년 10월 : 남파공작원 김동식 검거, '주체사상의 대부'가 북한에 다녀갔다'고 증언, 안기부 수사 시작
🦑 1997년 4월 : 황장엽 북한 노동상 비서, 남한 망명
🦑 1997년 9월 : 김영환, 민혁당 해체 선언, 하영옥은 반발
🦑 1997년 10월 ~ : 김영환. 중국 거주 아내 만나기 위해 출국
최정남, 강년정 부부 간첩. '김영환 소개로 왔다'며 정대연 울산연합 집행위원장 접촉하려다 정 위원장의 신고로 체포됨
🦑 1998년 5월 ~ : 김영환. 월간 《말》 기고 통해 김일성, 김정일 비판하며 북한과 결별 선언.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전향하였으며, 그 이후 《북한 문제와 인권에 대한 민주화》를 위해 노력
🦑 1998년 11월 ~ : 남파 간첩 원진우. 하영옥을 만나 민혁당 재결성 약속 후 김정일이 내린 '광명성' 대호(암호명)을 부여하고,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
🦑 1998년 12월 ~ : 대한민국 해군. 원진우를 태우고 북한으로 가던 반잠수정 격침. 하영옥은 북한에 이를 보고
🦑 1999년 3월 ~ : 해군. 북한 반잠수정 인양. 국정원, 민혁당 관련 문건 대량 입수
🦑 1999년 6월 ~ : 김영환. 《월간조선》과 단독 서면 인터뷰. "김정일 정권은 주체사상의 적" 선언
🦑 1999년 7월 ~ : 김영환. 가족을 통해 탄원서 제출 후 자진 귀국. 밀입북과 민혁당 결성 등 자백
🦑 1999년 8 ~ 9월: 김영환. 홍콩으로 탈출 시도하다 김포공항에서 체포 이후 조유식, 하영옥, 심재춘(서울대 88학번, 하영옥의 연락책), 김경환(월간 《말》 기자) 등 체포. 국정원, 민혁당 사건 중간수사 발표
🦑 2000년 8월 ~ : 영남위원장 최진수 등 주요 간부 4명 검거
🦑 2000년 9월 ~ : 부산지역위원장 이의엽 검거
🦑 2001년 9월 ~ : 전국연합. '민족진주전선 일꾼전진대회'에서...
<인권운동가로서의 김영환 : 98년 이후 ~ 현재> :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기간
🦑 2012년 : 중국에서 114일간 수감 후 중국에서 추방됨
현재 주사파는 1989년 전대협 이후, 지하로 내려갔으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는 북로파로 변신을 하였습니다.
북로파로 변신한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은 두 개로 갈라집니다.
이석기파와 하태경파로 갈라집니다.
이석기파는 더불어민주당을 접수하였고,
하태경파는 국민의힘을 접수하였습니다.
이 현실을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