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발의 총성, 유신의 심장이 쓰러졌다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 일은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틀 뒤, 군부 실세가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들어냈다.
정치군인 전두환은 국민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는 사실살 인지도가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 1979년 12월 12 일(대통령 서거 47일 경과)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같은 날, 저역 7시 |
저녁 7시에 8명의 군부 핵심인력 들이 모여들었다.
같은 시각, 허화평 대령(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3명을 소환했다
같은 시각, 한남동 육군참모 총장 본관으로 향하고 있는 허삼사대령은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헌병대 병력 50명과 함께 했다
정승화 대장(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기 위함이었다.
-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총장이 10.26 사건(박대통령 시해)의 배후로 엮고, 권력 장악이 목표인 것일까? 아니면
- 정권 탈취가 아니라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현 국가 체제 안정화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습득된 5공화국 정권일까?
-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위기 조장에 의해 최규하대통령 체제를 탈권하기 위해 만든 국가 위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헌신한 취득 정권일까?
(참고 영상: 펜앤드마이크TV, 보기1, 보기2)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해석하는 것만이 유일하며, 그 해답 또한 하나님만이 알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정치군인으로 성장했던 전두환은 10.26 사건을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전두환 대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 시가행진 이 시가행진의 성공으로 인해 전두환 대위는 “국가재거최고회의 의장、 민원비서관”으로 임명이 됩니다 대령급 자리에 대위가 임명된 것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민정이양 당시 1963년 전두환대위에게 “국회의원 해볼 생각없나¿” 라고 권면하였다고 합니다。 전두환 대위의 답변이 너무 좋습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후、 특별히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 -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 보안사령관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 사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 대위의 18년에 걸친 정치학습 기간은 1961。5。16~1979。10。26 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왔을 때 그가 그 기회를 선택합니다。 |
전두환은
박정희의 제자이자 아들이다
-글아이스틴 대사 (당시 주한미군대사)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에 참가했습니다.
미8군 사령관 매르루더는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군사 쿠테타》 인 것이며, 성공을 하였다
《육사 생도 및 ROTC 졸업생 1천명의 시가행진》
이 없었다면 5。16 성공은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 대위 전두환은 대단히 유능한 인력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키지 않은 것을 척척 잘하니까、。。。。。
같은 날, 저녁 9시 |
5공수여단은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였고,
최전방 부대인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예하 부대를 동원해 중앙청을 점령했다
당시 최전방부대 이동에 대해서는 "방미군사동맹협정"에 따라 미군허가를 필요했지만, 모두 무시하였다.
유신 체제를 바꾸려는 정치 세력들 : 서울의 봄을 만들려는 사람들 |
개헌과 관련한 논의를 위해 3김이 모두 모였다.
지식인들과 많은 의식있는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5월 즈음에 대통령 직선제, 4년 중임제 등이 도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유신 이후에 새로운 체제를 위한 시민사회의 갈망을 보여주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전두환 |
권력 이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전국으로 확대되는 저항 : 학생 운동 |
신군부에 대한 저항은 점점 거세어 졌고,
드디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무장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시민들의 자기 보호 노력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어디에서 이러한 무기를 확보했는가, 민간인이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여러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국가 질서는 무너졌고, 국민 통치를 위한 권력이 공백상태이다
12.12 사태로 시작해서, 5.17 쿠테타 그리고 5.18 광주 폭동으로 이어졌다
전두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에 의해 유신체제 이후의 민주주의 국면으로 무사히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였다.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의 야망이 폭력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진정 그들은 새로운 독재자인가?
아니면 국가 질서를 바로잡은 시대의 인물인가?
🐓 1980년 5월 18일 ~5월 27일 까지 (10일 동안)광주는 《총기를 든 폭동》이다
(출처:KBS시사, ‘각하’ 전두환의 청와대를 들여다보다...그리고 끝끝내 사과는 없었다.(2021.11.28. 방송, 영상보기)
자료 1: (일본NHK방송 보기) - 계엄령하의 한
자료 2: 조선일보 기사 보기 -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자료 3: 조선일보 기사 보기 - ( 1979년 12월 12일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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