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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유배자의 영성

내 안의 가짜 신(=우상)을 찾아서 1

성경은 인간은 무엇이든 자신이 사랑하고 믿는 대상 또한 섬기게 마련이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타협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보다 중요해지면 우리를 속박하는 우상이 됩니다.

우리를 주체할 수 없는 분노나 불안, 낙심에 빠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떨칠 수 없는 죄책감으로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우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서일 것입니다

저는 제 안에 있지만 애써 외면하며 없다고 가정을 한 '가짜 신(=우상)'을 찾아 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적절한 경계선을 벗어난 요구(추구)나 관계는 좋은 것일지라도 이미 가짜 신으로 변했다는 증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랑메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팀켈러의 내가 만든 가짜 신, 29쪽, 두란노-

1. 아브라함 : 외아들 이삭의 생명을 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비합리적인 모순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답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구약의 다른 인물인 욥과 맥을 같이합니다. 욥은 영문도 모른 채 무수한 고난을 당했지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은 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산으로 걸음을 옳겼을까요?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세기 22:5)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그가 구체적으로 알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산에 올라갈 때 아브라함은 의지력과 자기암시에 충만해서 "내가 할 수 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그 방법을 내가 모를 뿐이다" 라고 말하며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도 이렇게 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맹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미친 짓이고 살인이지만 그래도 나는 하겠다" 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안다.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이번에도 하나님이 그런 분임을 보이실 것이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빚진 자임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믿었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산으로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 거룩하고 사랑 많으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야곱과 레아 :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을 가짜 신으로 삼는 일이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창세기 29:17)


창세기 29장에 나오는 야곱과 레아의 이야기는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을 가짜 신으로 삼는 일이 가능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남자는 사랑을 이용해 섹스를 얻고, 여자는 섹스를 이용해 사랑은 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문화에서는 사랑을 하나님으로 혼동하기가 더 쉬어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휩쓸려 희망을 몽당 거기에 걸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 - 사랑을 쫓아다니다 노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창세기 29장 30절). 레아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로맨틱한 사랑과 관련된 남녀의 전형적 우상은 양쪽 다 막다른 골목입니다.
당대에는 아들을 낳는게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모든 희망과 꿈을 남편에게 걸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거서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을 수록 그녀는 지옥같은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레아의 영적인 성숙 과정을 통해서 저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레아가 섬긴 신은 '남편' 이었습니다. 남편 야곱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들도 그렇게 지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거부했으므로 그녀의 삶은 늘 빈곤하고 불행했습니다. 레아는 이 슬픈 이야기에서 영적 성장을 보이는 유일 한 인물입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세기 29장 36절)

이 구절은 매우 슬프지만 매우 경이롭습니다. 남편 야곱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이 참 신랑임을 알게 된 레아의 깨달음이 부럽습니다. 레아는 혼란에 빠져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인격적인 은혜의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출산의 세월이 모두 흐는 후에야 찾아왔지만 그래도 부럽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줄고 나이가 들어 검은 머리가 없어지는 중년의 나이에 여호와께 돌아왔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레아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5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에는 당당한 기백이 묻어납니다. 이전의 세 아들을 낳고 선포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번에는 남편이나 아이가 언급되지 않아요 ~~ 마침내 그녀는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희망을 남편과 자녀에게서 떼어내 여호와께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과 라반은 레아의 삶을 앗아갔지만 그녀는 결국 주님께 마음을 드려 삶을 돌려받았습니다. 결국 그녀를 예수님이 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세상에 구원이 임한 통로는 아리따운 라헬이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아 사랑받지 못한 레아였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여 어쩔 줄 몰라하십니다. 아무도 봐 주지 않는 사람까지도 말입니다
할렐루야 ~ 오늘을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기다리시며 저와의 교제를 원하시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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