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_유배자의 영성

[두려움의 시대에서 희망] 16. 높은 보수나 칭찬 그리고 식욕을 위해 일하기.. ?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6장 25절)
There is a way that
seemeth right unto a man,
but the end thereof are the ways of death.

고되게 일하는 자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잠언 16장 26절)


저는 과거에 고되게 일하는 자였습니다.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였던 자입니다.
하는 일이 합법적이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면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돈벌이가 될까?” 뿐 이었습니다.
손익분석을 토대로한 윤리를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성실은 ‘남는 장사’고 불성실은 아니다.
맞는 말입니다.
적어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틀렸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거나 관계가 끊어지는 따위의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훨씬 유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형편에 따라서는 정직한 태도가 비즈니스에 해롭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직업 윤리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공공의 이익에 미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0. 차원이 다른 온전히 새로운 덕성 ; 일하는 동기의 변화 - 죽음과 희망

높은 연봉과 칭찬을 위해 일하지 않기로 고백을 하였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크리스천이기에 일정 부분 희생을 치르고라도 부도덕한 행동에 맞설 만한 토양을 갖추고 싶습니다.
솔직하고, 따뜻하며, 너그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설계를 감안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그런 처신 탓에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당하겠지요,
하지만 성경학자 브루스 윌키(Bruce Waltke)의 말마따나,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인들과 달리”, 불이익을 감수하며 다른 이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이 바로 ‘의인’ 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 하듯 하지 말라

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을 하는 동기가 소명에 있지 않고 높은 보수와 칭찬에 있었습니다.

저는 변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지 않고 죽음 이후에 있을 ≪궁극의 희망≫과 죽음 이전에 있는 ≪현대 세계의 희망≫이 서로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여러 분도 저의 마음가짐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당치도 않은가요? 헛된 것을 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시죠 !!!

시간의 끝으로 걷는 나의 모습

최근에 출간된 책을 소개합니다.

죽음을 지혜롭게 대면하려는 저자의 고민이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찾는 해답은 없는 것 같아요. 잠시 소개해 드립니다.

ㅇ 
“가루로 뿌려진 나는 이제 광대한 우주 속 원자 여행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꽃으로 나무로 스며들고 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바람에 실려 이곳저곳을 날아다닐지도 모른다. 좁은 납골당에 갇혀 단지 속을 웅크리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임은 분명하다.


내게 삶을 주었던 조상과 그대들을 세상에 내놓은 내가 그대들과 이어지는 시간의 수직선 위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점 하나를 찍고 이제 나는 소멸해 간다. 지금까지 내가 아니었던 새로운 것이 되기 위해 산산이 흩어져 갈 것이다. 우주의 한 곳으로 이동한 후 또 다른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려는 내 몸의 파편들, 비록 눈에 띄지도 않을 작은 알갱이지만 이런 내 몸의 일부를 향해 나를 사랑하는 모두가 힘껏 응원해주리라, 굳게 믿는다.”

- ‘죽음을 예감한 나무가 절정을 꽃피우듯 우리도’ 가운데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사려니 필명 저자는 죽음을 수용하는 하기 위해 날마다 수련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죽음 불안을 극복하라고도 한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불안과 두려움이 훈련의 기술이기에 나머지 시간을 가족과 보낼지 본인이 냉철하게 결정하라고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사려니 작가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한 첫 결실"이라고 책을 소개한다. 죽음을 직면하는 자세는 회피하여 잊으려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죽음의 기술에 대해 작가의 의견은 존중합니다. 저는 죽음과 죽음 그 이후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표준적 답변을 찾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을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1. 부활을 '죽음 이후의 삶' 혹은 '천국행'의 동의어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1995년 영국에서 실시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 즉 미래에 있을 육체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부활과 죽음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저는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현재 세계와 다가올 미래 궁극의 희망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는 바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재 역사적 사건있었으며, 이 부활의 권능이 오늘 지금 나의 삶 가운데서 운행하고 있기에 죽음에 대한 관점을 올바르게 갖고 싶습니다

#2.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바를 재조명하여 그 내용을 알고자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나에게 최상의 희망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최상의 근거를 가진 희망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3. 나는 본래 죽어 있었는데 영적으로 살아났다.

영적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내가 믿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천국의 삶이 지금 내 안에 들어와 나에게 주관적 여향을 미치기를 원합니다.
내가 미래에 처할 최종 상태를 이미 지금부터 맛보기를 하며 누리고 싶습니다.
즉, 저는 자유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음 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영광과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더불어 새로운 사랑의 연대를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 바울이 확언했듯이
우리 모두는 종말에 몸으로 부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부활하신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영적으로 이미 부활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5-7)

#4. 영적 부활은 우리가 이 땅에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하늘에 산다는 뜻이다. 현재 속에서 미래를 산다는 뜻이다


찬송가 작사자 아이작 와츠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온산에서 쏟아지는
갖가지 신성한 단맛,
우리가 천국에 이르러
황금 길 걷기도 전에

.끝.

반응형